고상한 무관심

at 2022-03-09 11:40:47.0 / 774 조회수

 ‘고상한 무관심’ (Noble Negligence): 자발적인 포기의 인생 
 

1.’고상한 무관심’이란? 우리가 청교도 특히 영국 청교도들의 글을 읽게 되면, 문체가 매우 단순하고 평범해서, 심지어 어린이조차 알아듣기 쉬운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청교도들은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가진 목회자요 학자들이 었다 (물론 심지어 정규학업이나 대학 교육을 못받은 소수의 청교도들도, 개인적인 엄청난 독서로 학식을 겸비한 사람들이 었다). 이런 신앙과 학식을 겸비한 가진 사람들이, 역설적이고 이상할 정도로, 문체적인 면에서 단순성과 평이함을 강조한다. 이런 문체적 특징을, 보통 ‘고상한 무관심’ (noble negligence)라고 부른다. 

2. 청교도 문체의 특징. 이 청교도적 ‘고상한 무관심’한 문체는, 일종의 , 자발적인 ‘지적 자살 행위’이다 (로이드존즈, [청교도신앙], 394). 이런 무관심의 특징은, 첫째로, 스타일보다는 내용을, 둘째로, 설교가 액세서리가 아니라 중심임을, 셋째로, 설교는 ‘단순하고 진지하고 체험적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 383-399). 반면 영문학상 유명한 존 던과 같은 목사이자 시인과 같은 국교도들은, 화려한 문체를 강조한 소위 ‘설교꾼’이었다. 반면, 이런 화려한 문체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킨다고 믿었던 청교도들은, 철저히 개인의 학식을 감추기 위해, 화려한 문체를 포기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언어의 설교, 즉 고상한 무관심의 태도를 강조한다. 

3. 대표적 ‘고상한 무관심’의 설교자들. 이런 점은 윌리엄 퍼킨스의 설교론을 시작으로, 리처드 십스, 토마스 왓슨, 등의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전수되어진다. 특히 리차드 백스터의 문체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백스터는 책을 읽거나 설교에서, 어거스틴의 말을 빌어서, ‘문체의 화려함에 속지 말고, 철저히 의미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Reformed Pastor, 115 재인용). 그래서 ‘철학과 지식은 철저히 숨겨져야 하고, 오직 신앙만 드러나야 한다’ (RP, 120) 말한다. 한마디로, 복음에 복종된 지식이다. 그는 말하길, ‘하나님은 무식한 어부들을 불러서, 위대한 설교자를 만들었지, 위대한 설교자들을 불러서 어부들을 만들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120). 이런 고상한 무관심의 태도에 대해 존 플라벨은 다음처럼 강조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문체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설교자들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John Flavel, 박영호, [청교도 실천신학], 633 재인용). 아울러 백스터는 이런 평범한 문체에 대해서, ‘가장 평범한 말은 가장 무거운 문제들에 있어 가장 유익한 웅변이다’고 웅변한다 (박영호, 632 재인용).

4. 고상한 무관심의 신앙과 목회—십자가의 제자들의 여정. 나는 백스터와 퍼킨스 등의 청교도들의 자발적인 지적 자살인, 고상한 무관심을 단순히 문체적인 면을 넘어서, 우리 신앙과 목회적인 면까지 생각해보고 싶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만을 드러내고, 철저히 우린 인간의 모습은 내려놓는 ‘자발적 포기의 신앙’이자, 철저한 ‘십자가의 제자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4-1. 바울과 세례 요한.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모든 사상은 그리스도께 복종될 것을 강조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5). 아울러,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증거하겠다고 했다 (고전 2:2). 세례 요한, 역시 철저히 그리스도만 높이려고 자신은 철저히 낮아졌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

4-2. 자발적인 권리 포기. 무엇보다도, 나는 이런 고상한 무관심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마음을 다시 읽게 된다. 모든 것이 주 안에서 할 수 있지만, 성도와 교회를 위해서 철저히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던 바울의 마음을 읽게 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고전 6:12). 나아가 이런 자발적인 포기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되지 않게 하려는’ 사도의 불타는 마음입니다.

4-3. 자발적 포기의 십자가. 물론 이런 고상한 무관심, 자발적인 포기와 절제, 빈 그릇의 신앙 태도는, 우리 주님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분께서는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기위해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침공하신,’ 탄생의 사건, 그리고 30년의 지상의 삶, 3년간의 공생애 동안에, 자발적으로, 이런 ‘고상한 무관심’의 포기,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까지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야 말로, 어떤 의미에서 성도들에겐, ‘고상한 무관심의 정수(essence)요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5. 결론을 대신하여. 그렇다면, 청교도들의 문체적인, 고상한 무관심은 단순한 문체적이고 문학과 설교학적인 면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제자도와 신앙, 목회까지도 포함하는, 매우 광범위한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아 그렇다면, 한마디로, 고상한 무관심의 신앙은, 그리스도와 교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성도들의 ‘십자가의 제자도의 여정’ (a journey of the discipleship of the Cross)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라기는 나와 우리 동역자 여러분들이, 함께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의 의미에 집중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상한 무관심’을 연습하는, 나아가, 주님의 고상한 무관심의 제자도, 아니 십자가의 제자도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그래서 장차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누리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이런 자발적인 ‘고상한 무관심의 신앙’을 실천하지 않으시겠습니까?